시조(始祖) 지백호(智伯虎) 감문왕(甘文王)(新羅)
자(字)는 인세(仁世), 시호(諡號)는 문화(文和), 휘(諱)는 낙랑후(樂浪侯) 지백호(智伯虎), 추봉(追封) 감문왕(甘文王)이시다. 삼한시대(三韓時代)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六村長)의 하나인 진지부촌장(珍支部村長)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하고 신라(新羅) 건국(建國)에 큰 공 (功)을 세웠다. 그 공(功)으로 개국(開國)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공(公)의 호양지의(互讓至義)는 신라(新羅) 건국(建國)의 모체(母體)가 되었고, 왕도(王道)를 토착(土着)시켰으며, 한 나라의 역사(歷史)를 창조(創造)한 원 훈(元勳)으로서 백성을 예(禮)로 가르치고 부족(部族)의 연맹(聯盟)을 이루 었으며, 백성(百姓)들이 그 덕화(德化)를 입어 윤리(倫理)가 바로 섰고 그 넓은 금도(襟度)와 위덕(威德)은 신라(新羅)의 국풍(國風)으로 이어 주었다.
서기(西紀)32년(유리왕9)에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部)로 승격(昇格) 개칭(改稱)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지면서 정씨(鄭氏)라는 성(性)을 하 사(下賜) 받았다. 서기(西紀)516년(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諡號) 되었고, 서기(西紀)658년(무열왕 3)에 감문왕(甘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
공(公)은 6촌장(六村長) 가운데 유일(唯一)하게 묘소(墓所)가 경북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의 백운대산록(白雲臺山麓)에 현존(現存)하여 매년 음(陰) 10월 1일 후손(后孫)이 향사(後孫)하고 있다.
백운재(白雲齋)는 관향제종(貫鄕諸宗)이 성상즉위(聖上卽位)14년에 건립(建立)하였으나 장구(長久)한 세월(歲月)을 거치는 동안 풍우(風雨)와 퇴락(頹落)되어 서기(西紀) 1984년에 중건(重建)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1971년 입덕묘(立德廟)의 제3위차 육촌장(六村長)에 열향(列享)되었다. 1987년 11월에 시조(始祖) 묘역(墓域) 및 열위조 기적비 세계비를 세운 뒤, 1988년 10월 신호비를 세웠으며, 1990년 11월에 홍살문 안내도 및 문정공(휘진후)의 묘단비를 세워 성역화(聖域化)하였다.
참고문헌(參考文獻)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문헌록(文獻錄) 동경지(東京誌)
묘소 전경(경상남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
중시조(中始祖) 문정공(文正公) 정진후(鄭珍厚)(高麗)
호(號)는 매포(梅圃),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 정극중(鄭克中)선조의 큰 아들이다.
공(公)이 태어나고 돌아간 연대(年代)는 기록(記錄)이 없고, 다만 족보(族譜)와 공(公)의 가정(家庭)에 전(傳)하는 말에는 문장(文章)과 명예가 높아 남들이 따라갈 수 없다 하였다. 특(特)히 이학(理學)과 문장(文章)에 밝았던 것으로 전(傳)해져 오고 있으며, 고려(高麗)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호부상서(戶部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歷任)하였고 문정(文正)으로 시호(諡號)를 받고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해졌다. 월성(月城)은 경주(慶州)의 옛 지명(地名)으로 후손(後孫)들이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정하고 이후(以後) 정진후(鄭珍厚)를 경주정씨(慶州鄭氏)의 득관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로 부(父) 한림(翰林) 굉(?)이다. 재배(在配)는 이씨(李氏)로 부(父)는 지주사(知奏事) 공승(公升)이다.
묘(墓)는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있고, 매년 음력(陰曆) 10월 1일에 향사(享祀)한다.
묘소 전경(경상남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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